내 인생의 변곡점(變曲點)
변곡점이란 어떤 힘이나 의지가 한 방향으로 가다가 다른 방향으로 꺾이는 지점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과 관련되면 그 행로가 변하게 되니 두려운 말이기도 하다. 사람의 일생에는 이런 변곡점을 여럿 겪는 이도 있겠고, 거의 격지 않는 이도 있을 수 있다. 나는 비교적 많이 겪은 사람 중의 하나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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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월, 고교 졸업을 앞둔 시점. 나는 부산행 기차를 타려고 밀양역 승강장에 나가 있었다. 부산 해양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기 위해서였다.
평소의 생각은 서울대학 쪽이었고, 성적도 어느 정도 뒷받침 되고 있었지만, 등록금 등 학비가 문제였다. 당시 가형은 이미 서울공대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농촌 살림에 둘씩이나 서울로 보내기에는 힘이 달렸던 것이다. 해양대학교는 국비 교육이어서 따로 돈이 들지 않았다.
그 시각, 승강장에서 한 집안 어른을 만났다. 팔촌 척으로 삼종조부(三從祖父)이며, 당시 경북사범대학 교수로 계셨다. 대구에서 내가 중학을 다닐 때 한 집에서 하숙하며 두어 해 모시고 있었던 적이 있다. 대구로 가시는 걸음이었다. 나를 반기며, “어디 가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여차여차해서 부산 가는 길이라 대답을 했다. 이 어른은 대뜸, “야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노. 서울로 가라!”라고 일갈(一喝)을 하시는 것이었다.
이 확신에 찬 호통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나의 인생행로는 이로 해서 크게 출렁이었다. 이 어른의 일갈은 나에게 없던 용기를 솟아나게 해주었다. 이로해서 부산 대신 서울이 목적지로 바뀌었다. 그 어른을 그 시각에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마도 ‘마도로스’로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것도 괜찮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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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초의 목표대로 서울상대에 입학하였고, 첫 직장은 산업은행 조사부였다. 조사역으로 있던 어느 날, 나는 무슨 일로 담당 이사(理事)님을 모시고 재무부 이재국에 갔다. 대리급에게 이사는 하늘만큼 높은 분이다. 이재1과는 한극은행 산업은행 등 공공 금융기관을 관장하고 있어 시쳇말로 힘이 막강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날 보아서는 아니 될 광경을 목도하고 말았다.
초로(初老)이신 이 이사님은 1과에 들어가면서 출입문 앞에 앉아 있는 사무관으로부터 시작해서 과장 등등 만나는 자마다 깍듯이 인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이 ‘젊은 관리들’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아서 알은 채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목불인견(目不忍見)으로 여겼다. 두 번 볼 장면이 아니라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설사 이 은행에서 저 높은 자리까지 간다고 하더라도 오늘과 같은 장면을 연출해야 한다면, 그게 무슨 굴욕이냐 싶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 이듬해인가. 나는 마침 삼성비서실과 연이 닿아서 거리 옮기고 말았다.
밀양역에서 남행 대신 북행을 택한 것이 타력에 의한 변곡점이라면, 삼성에의 전직은 자력에 의한 것이다. 인생의 변곡점은 이러저러한 모양으로 다가오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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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을 필자가 처음 대면하기는 1973년 입사 때의 통과의례인 면접을 치를 때였다. 두 번째 대면하기는 삼성물산 기획조사실장으로 동분서주하던 1975년 5월의 어느 날, 회장실로부터 갑작스러운 호출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각 지점에 연락하여 살구 제품(건살구 ․ 주스 ․ 잼 ․ 통조림 ․ 살구술 등등)을 수집하도록 지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하여 나는 이후 1년 반을 나의 본 직무와 아울러 살구와 씨름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주일이 멀다 하고 그 ‘지엄한’ 회장님의 면전에 나서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살구와 내가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즈음, 이 회장은 ‘용인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의 개발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유실수의 하나로 살구를 높이 평가하고, 개량살구 묘목을 전국 농가에 보급하는 중이었다. 이 어른 말씀에 따르면, 살구는 과일 자체도 여러 가지 식품으로 가공할 수 있고, 살구씨 행인은 암 치료제로 쓰이며, 나무는 고급 가구의 재목으로 쓰이는 등,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어쨌건 그해 6월, 이(李) 회장은 나에게 해외의 살구 시장을 조사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살구 일에 관한 한 회사의 조직 체계는 무시되었다. 모든 지시는 이(李) 회장이 나를 불러 직접 내리거나 비서실장을 통해 왔다. 나는 사원 1명을 대동하고 구미(歐美) 쪽으로 향했다. 미국에 닿자 나는 우선 LA 지점을 거점으로 하여, 이 방면의 현지인 전문가를 물색, 대동하여 캘리포니아 주(州)의 「프레즈노」와 「모데스토」 일대의 과수원 지대를 살펴보았다.
「프레즈노」는 샌프란시스코 남동쪽 26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건포도의 산지로 유명해졌지만, 비옥한 토양과 온난한 기후, 그리고 관개설비가 잘 갖추어져, 미국에서 가장 집약적인 농업이 이루어지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살구를 비롯한 과수 재배가 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나는 이 길에서 ‘프리웨이’ 주변에 펼쳐진 평원의 밀밭과, 록키산맥의 자연수를 이용하는 관개수로 등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이 나라의 천혜가 사무치게 부러웠다. 이후, 뉴욕으로 비행하면서도 끝없이 펼쳐진 ‘프레리’를 내려다보면서, 이 나라 국토의 광대함을 목도하고는 우리의 비좁은 국토가 연상되어 씁쓸한 기분에 젖어들기도 했다.
LA에서 약 1주일을 체재한 후 나는 뉴욕으로 갔다. 오늘날, 세계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지라 해도 좋을 뉴욕에 온 것이다. 나는 주재원의 안내를 얻어 ‘브루클린’ 지역의 청과물 도매시장을 살펴보았다. 세계 각처에서 각색의 청과물들이 어지간히 모여 들었다 싶었다. 유럽으로 건너가서는 영국 ․ 독일 ․ 프랑스에서 살구 가공제품 현황을 알아보고, 스페인에서는 사라고사 지역의 살구 재배상황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애써서 북반구 곳곳의 살구 시장을 조사는 했지만, 결과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재배면적은 매년 줄어들고 있고, 단지 안에 치목(稚木)은 없고, 고목들만 보였다. 또 가공성이 까다로워 살구 제품의 가격은 다른 과일 제품보다 고가였다. 나는 이런 내용을 자세히 담아 이 회장께 보고했는데, 이런 부정적인 결과보고에 대해 서운해 하는 것 같았다.
살구에 대한 이 회장의 집념은 매우 컸다. 나의 그 보고 후에도, 살구 제품 수집은 계속되었고, 제일제당에서 살구주스와 살구통조림 시제품을 만들게 하기도 했다. 이 무렵, 나는 용인으로 바로 출근하여 온 종일 이 회장 곁을 떠나지 못한 날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살구사업은 오래잖아 중단되었다. 그 어른이 공력을 많이 들인 것을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지만, 그 정도에서 손을 뗀 것은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는 중동(中東) 주재를 마치고 사표를 썼다. 이 때 내 나이는 마흔세 살이었다.
삼성시절 한세상이 후딱 지나갔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많은 것을 배웠다. 비록 소걸음이긴 하지만, 내 능력껏 달려왔으니 후회될 것도 없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안고 떠날 수 있어 좋았다. 다만, 모르는 사이에 내게 다가와 인생의 한 변곡점을 만들어놓고 떠나가 버린 살구와의 미묘한 인연이 새삼 흥미롭기만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