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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 채명신 장군

야성 2014. 3. 18. 10:26

 

채명신 6·25전쟁과 월남전의 영웅

 


	채명신 별세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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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5pixel, 세로 10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1년 11월 04일 오후 2:08 채명신

 

베트남 전쟁 주월남 한국군 사령관

예비역 중장

    

 

1965년 주월사령관을 맡아 1969년까지

한국군의 위상을 세계에 떨친 주역.

     

1926년 황해도 곡산에서 출생한 뒤

평양에서 성장

 

6·25 전쟁에 백골병단을 지휘했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5·16에 가담.

    

 

혁명 5인 위원회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참여했다가,

 

주월한국군 사령관에 임명돼 1969년까지

4년간 참전 한국군을 지휘했다.

   

 

고인은 참전에 반대했으나 사령관에 임명되자

명령을 수행했으며,

    

채명신 파월한국군사령관.

 

참모총장 후보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개헌을 반대 1972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군 복무 중 태극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등의 훈장을 받았다.

   

 

퇴역 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태권도

보급에 공을 세웠다.

 

    

    채명신 장군(가운데)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6720일 소장에서 중장으로 승진했다. 사진은 베트남전 종합보고를 받은 뒤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채장군에게 중장 계급장을 달아주는 모습. [중앙포토]

김일성 손 뿌리친 반공주의자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반공주의자가

된 계기를 고백한 적이 있다.

 

 

교사 시절 친하게 지내던 소련군 대위가

술을 마시면서 그에게

 

“공산당에 계급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공산당에 들어가지 마라.

 

 

너도 집안도 나라도 모두 망한다”는 말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소련군 부대에서 계급별로  차별해

식사 배급 실상을 보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공산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46년 군사정치학교 개교식 때 만난 김일성이

“젊은 동무가 필요하다”며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지만 노모를 핑계대고

뿌리칠 수 있었다.

 


47년 월남 49년 육군사관학교 5기로 졸업

6·25전쟁에 소위로 참전했다.

 

 한국전쟁은 그가 혁혁한 무공을 세우는

무대였다.

 

 

특수유격전 부대 백골병단을 지휘해

야전군인으로 명성을 쌓았다.

 

북한 대남유격부대 길원팔 총사령관을

생포한 일화가 유명하다.

 



 김일성의 손을 뿌리치고 월남한 반공주의자,

5·16 쿠데타에 가담했지만

 

유신에 반대하며 직언을 마다하지 않은

소신파 군인.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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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에 참여한 핵심세력 5인위원회

멤버였으나.

 

쿠데타 성공 후 박정희 대통령과 다른

길을 걸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부대를 원대 복귀시켰고

 

박 대통령이 세 차례 정계입문을 권유했으나

뿌리쳤다.

 

 

유신 이후 박정희 대통령에게 비판적 직언

대장 계급을 달지 못했다.

베트남전쟁은  무인으로서 능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미군이 한국군에 작전 지휘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한 승전 비법을 직접 설명

독자적인 작전권을 확보했다.

 

 

전술 전략은  미군 총사령관이 탄복

높은 평가를 받았다.

 

원거리에서 사격을 하지 않고 근접하도록

유인 공격하는 전법이다.

 

 

이를 통해 당시 우리군의 피해는 줄이고

적군에 큰 타격, 전과를 올렸다.

백선엽 장군이 6·25전쟁에서 유명해진 것처럼

고인은 베트남전에서

 

 

미군들로부터 군신으로 불렸고 세계 전사에

소개됐다.

 

나에겐 철모가 필요없다며 평생 천으로 만든

전투모만 쓴 채 지휘했던 군인.

 

 


1972년 대통령을 만났을 때  '만일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정권 연장을 한다면

 

각하 생명을 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 만남에서는

 

'욕을 먹더라도 십자가를 메야겠어'라고 하자 

'각하, 십자가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라고

반박했다.

 

 
박 대통령이 시해되자 '그때 정치적 생명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었는데'하며 후회했다,

 

정권마다 그에게 제의를 해왔으나 그는 군인으로

살고 죽겠다고 했다."

 


그는 유언에 따라 장군 묘역 대신 평생을 함께한

병사들과 함께 사병 묘역에 묻혀있다.

출처 : 안사10회 친목cafe
글쓴이 : 반석 이영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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