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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종필 증언록(笑而不答)

야성 2015. 5. 2. 12:30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 부장이

일본 외무성에서 오히라 외상과 회담.

 

4시간 회담에서 3000만 달러로 청구권 협상

금액이 ‘6억 달러+알파’까지 올라갔다.

 

JP는 일본 전국시대의 고사를 인용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어떻게든 두견새를

울려 보자”고 설득했다.

 

오히라의 마음을 움직였다.

 


 

박정희-이케다 한·일 회담이 1년이 지나도록

실제적인 진척이 없었다.

 

의제는 한·일 관계,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

재산청구권, 어업 문제, 문화재 반환 등이었다.

 

이 중에서 제일 난항이었던 게 청구권 자금이었다.
1962년 10월 나는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들르기로 했다.

 

나는 민주당 시절 5차 한·일 회담 수석대표로 활동했던

유진오 박사를 초빙했다.

 

일본이 우리한테 정말 얼마나 줄 수 있다고 보시는가?

유 박사는 3000만 달러 이상은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그 액수는 우리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본이 우리를 36년간 지배했으니 36억 달러를

 

어떤 사람은 최소 10억 달러는 받아내야

한다고 한다.

 

으음~ 8억. 김 부장, 8억 달러 어때. 그걸로

제철소, 기계공장도 만들고 해보자고.

 

궁리 끝에 내놓은 8억 달러는 박 의장이

지침이었다.

 

 

 

미국 방문길에 일본에서 이케다 총리,

오히라 외상, 오노 자민당 부총재를 만났다.

 

 

 

협상은 귀국하는 길에 벌렸다. 오히라 외상.

나보다 열여섯 살 연상이다.

 

그는 비상한 사람이었다. 꺼내는 말을 적으면

훌륭한 문장이 됐다.



62년 11월 12일 저녁, 나는 오히라와 마주 앉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귀국이 청구권 자금으로

지불할 금액을 얼마로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오히라는 “3000만 달러”라고 자르듯 말했다.

3000만 달러는 어디서 나온 기준이냐”고 밀어붙이자

 

"내가 생각한 내용이다”고 맞받았다.

“총리와도 상의한 이야기냐”고 다시 묻자

 

“총리하고는 얘기했다. 총리는 3000만 달러도

많다고 하더라”고 눙쳤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왔다갔다 했다.

창 밖은 벌써 캄캄해졌다.

 

잠깐 열린 문 밖을 보니 기자들이 30명쯤 가득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얼마를 줄 수 있는지 본심을 말해 보라”고 했다.

 

오히라는 끙끙거리더니 “5000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나는 과거사 문제를 꺼냈다. “당신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할 때 수탈한 것이 적지 않다.

 

우리는 전쟁까지 겪었는데, 그 원인 또한 당신들의

잘못 때문 아니냐.

 

5000만 달러라니. 그 정도 가지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했다.

 

오히라는 잠시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나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고 뒤로 뺐다.

 

 

 

나는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전국시대(1491~1565년)의 고사를 꺼내 들었다.



100년 가까이 이어진 당신네 전국시대에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 사람의 성격을 잘 안다.

이들에 의해 전국시대가 종지부를 찍고

 

300년 동안의 도쿠가와 막부가 이어지지

않았느냐.

 

‘울지 않는 두견새를 어떻게 울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 세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느냐.”

내 입에서 일본의 고사가 나오니까

오히라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아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는 내 이야기에 빨려 들어왔다.

 

오다 노부나가는 ‘호토토기스(두견새),

울지 않거든 죽여버려라’고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거든 울려

보자’고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자’고 말했다.

 

당신과 지금 내가 마주 앉아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느냐.

 

 

 

 

울지 않는다고 새를 죽여야 하겠느냐,

울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겠느냐.

 

우리는 어떻게든 새를 울게 만드는 도요토미

방식을 택해야 하는 입장 아니냐.

 

그런데 그렇게 가볍게 5000만 달러라고만 하니

이게 말이 되느냐.”

오히라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놀란 표정이었다.

메모하던 연필을 내려놓고 나를 쳐다봤다.

 

“어디서 그런 얘기를 다 들었느냐”고 물었다.

“내가 나서부터 일본말을 배웠다.

 

일본에서 발간한 책을 읽어 당신네 나라

역사를 안다”고 대답했다.

 

그는 생각에 잠기더니 “음~ 사실은 우리가 달리

생각하는 안이 있다.

 

무상 2억 달러, 유상협력기금 형식의 3억 달러,

전부 5억 달러다”고 털어놨다.

 

 

 



세 시간 동안 막힌 얘기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5억 달러. 어느 정도 타결선에 가까워진 셈이었다.

 

“무상을 3억 달러, 유상을 2억 달러로 하자.

민간에서 1억 달러 플러스 내게 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3억(무상)+2억(유상)+1억 플러스 알파(민간)’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4억 달러였다.

패전 복구가 진행되고 있어 재정이 어려울 때였다. 

 

그 내용을 적은 게 바로 ‘김종필-오히라 메모’였다.

 

 

 

 

①무상 3억 달러

②유상(대외협력기금) 2억 달러

③수출입은행에서 1억 달러+α를 제공한다’였다.

오히라는 메모를 작성한 뒤 나는 이거 잘못하면

쫓겨난다.

 

당신의 ‘두견새 울리기’ 얘기를 듣고서 생각을 고쳤어.

내가 졌어”라고 해 함께 크게 웃었다.

 

나는 돌아가면 우리 국민들한테 매국노

이완용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혁명 때 한 번 죽은 몸이라는 심정으로

이 일에 부딪치고 있소”라고 말했다.

 

김-오히라 메모의 6억 달러+알파는 65년 양국

최종 타결 과정에서 8억 달러로 조정됐다.

 

대일 청구권 자금은 포항제철(1억3000만 달러)과

경부고속도로, 소양강 다목적댐에 쓰였다.

 

포철은 입지 선정과 제철기술 도입 등에 내가

나섰다.

 

동해안을 돌아다니며 항구 건설이 용이한 포항을

제철소 부지로 선택했고,

 

신일본제철 회장이 공장 설립과 기술 도입을

도와주도록 했다.

 

포철은 세계 5위의 자동차, 세계 2위의 조선

생산국이 철강 자재 공급원이 됐다.

 

청구권 자금을 밑천 삼겠다는 혁명정부의 구상이

성공해 보람을 느낀다.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초대 총리.안중근에게 저격당함.

사이고 다카모리. 메이지유신의 주역.

미우라 고로(일본공사). 낭인들 동원, 명성황후 살해.

◆일본 전국시대 = 15세기 말부터 100년 동안

약 300명의 군웅이 할거했던 시절

 

막부 시대 말기 쇼군(將軍)의 권력과 권위가

떨어지면서 지방 영주들이 독립하고,

 

전란이 일본 전역으로 확대. 쇼군은 편안한 일생을

마친 사람이 없을 정도 정세가 불안했다.

 

구질서 구체제가 붕괴하고 새로운 것이

탄생되는 시기였다.

 

 

 

 

전국시대 3대 인물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꼽힌다.

 

오다가 전국시대 100여 년의 혼란을 종식하는

통일의 가닥을 잡은 사람이라면,

 

도요토미는 그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하고

일본 통일을 이룩했다.

 

도쿠가와는 도요토미 세력을 물리치고 전국시대

승자가 돼 264년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열었다.

(중앙일보)

 



 

 

출처 : 안사10회 친목cafe
글쓴이 : 반석 이영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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